2011년 9월 1일 목요일

내가 생각하는 예술적 아름다움

 도대체 예술에서 말하는 진정한 미란 무엇인가? 무엇을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며 좋은 예술이라고 이야기 하는가?

예술가로써 누구나 한번쯤 하는 고민일지도 모른다.

나 또한 항상 고민하고 질문하는 그런 주제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어렴풋한 나만의 "절대적기준점"이있어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한다.
첫째, 감정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예술작품이 있다. 감정적 아름다움이란 다른 부수적인 모든 자극들을 배재한체 오로지 솔찍한 마음과 감정의 동요를 통해 전달되는 자극을 말한다.
예를들어, 이성보다는 현실의 감정을 중요시여긴 많은 표현주의 작가들에게서 그러한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는 작품을 찾아볼수있으며, 구체적으로는 뭉크의 작품을 예로 들수 있다. 그에대해 모르는 이가 그의 그림을 볼지라 하더라도, 그에 그림에는 대중을 압도하는 어떠한 감정적인 힘이 있다. 그 표현의 힘은 개인의 철저한 고뇌와 그 감정의 시각적표현을 의미한다.
둘째, 지적 아름다움

셋째, 시각적아름다움



이것이 현대적 미술: 로버트 라우센버그에서 롱갤러리까지


우리 시대의 피카소

‘우리 시대의 피카소’는 생전에 명예와 부, 대중적 인기 모두를 거머쥐었지만, 일찌감치 미술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덕에, ‘살아 있는 화석’으로 미술계의 비난과 조롱을 감내해야 하는 작가의 모순적 상황을 의미한다. 1950년대부터 60년대 중반까지가 최전성기였던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자신의 작품에 성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추상표현주의에서 팝아트로 전개되는 현대미술의 역사에 교두보 역할을 하면서 ‘미국의 피카소’로 추앙받았다. 제프 쿤스는 1980년대 유행했던 키치 미학을 바탕으로, ‘미술사적 농담’을 던지는 개념주의적 성격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전후 미술과 컨템퍼러리 아트를 분리하는 살아 있는 기준점이다. 데미안 허스트는 80년대 후반에 ‘yBa’의 리더로 세계적 주목을 받으면서 영국 현대미술의 부활을 이끌었지만, 지금은 국제미술 시장의 비정상적 호황과 일련의 소동을 상징하는 ‘퇴물’로 전락하였다.


전후 일본 아방가르드 미술

제국에서 태어나 패전국의 젊은이로 교육받았으며, 1930년대생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전후 일본 아방가르드 미술의 대표적 작가를 살펴본다. 쿠도 테츠미는 원자 폭탄의 트라우마를 작품의 내적 동력으로 삼고, 원폭 이후 가상의 변종 생태계를 꾸며내 서구의 휴머니즘이 지닌 이율배반적 성격을 비판하는 작업을 제작했다. 요코오 타다노리는 다이쇼/쇼와 시대의 토착적 디자인 문법을 차용해 전후 재건된 일본의 도상학을 재구축했다.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전위예술그룹 ‘하이레드센터’를 조직해 활동하면서, 전후 일본에서 ‘예술이 무엇인가’란 질문에 강렬한 화답을 던졌다. 오노 요코는 “진실의 직조”를 작업의 신조로 삼고 개인의 거짓을 세계가 공유하는 실제로 만듦으로써 인생 자체가 ‘아트’와 ‘역사’가 되었다.


에이즈 시대의 미술

1981년 등장한 에이즈는 사회 전반의 보수화를 촉진했을 뿐 아니라, 예술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대표 듀오 작가 길버트와 조지는 종교적 도상의 형식을 차용해 청소년 범죄와 에이즈를 비롯한 각종 사회 문제를 우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외설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에이즈에 걸린 이후 논란을 일으킨 포르노그라피 형식의 사도-마조히즘적 이미지 대신, 이상화된 육체의 아름다움과 그에 상반되는 죽음의 문제를 탐구했다. 장 미셸 바스키아와 함께 80년대 그라피티 작업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키스 해링은,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로서 직접 에이즈 재단을 만들어 에이즈 공포증과 동성애자 차별에 맞서 싸웠다. 쿠바 태생으로 90년대 뉴욕에서 활동하다 에이즈 관련 합병증으로 요절한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는, 에이즈로 먼저 사망한 자신의 동성 애인과 연관된 개인적 일화와 기억을 정치적 비평 혹은 성찰이 되도록 만들었다.


대중문화의 재탄생

다양한 대중문화 요소를 작업의 기초로 삼고, 새로운 문화·사회사적 의미를 직조해내는 작가들의 작업을 살펴본다. 미국식 편집광인 리처드 프린스는 각종 광고 사진, 성적 농담, 다른 작가의 작품과 같은 다양한 수집품으로, 미국사회의 독특한 속성, 즉 ‘미국성’이란 관념을 드러낸다. 현태준의 작업은 대중문화의 파편적 요소를 편집증적으로 수집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축된 이상향의 세계에서 쾌락을 얻는 일본 ‘오타쿠’ 문화의 한국식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칠진』과 『가짜잡지』는 미술계에 등장한 한국식 대안 잡지로, 1970년대 중반 미국의 뉴욕에서 태동한 ‘다운타운 문학계’의 대표 잡지인『C와 D사이』처럼 “비주류의 시학”을 담고 있다.


개입의 방식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 다양한 사회 문제에 개입하는가? 고든 마타-클락은 재개발을 앞둔 주택을 반으로 자르거나, 버려진 건물 바닥과 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의 공간 관념을 지배하는 건축 질서의 이면을 드러냈다. 크시슈토프 보디츠코는 뉴욕의 노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쇼핑 카트를 개조한 노숙차를 만들어 자본주의 모순을 드러내는 정치적 공공 미술을 선보였다. 디르크 플라이슈만은 인터넷 강국인 한국에서 아직 세컨드라이프(Second Life: 샌프란시스코의 린덴랩이 시작한 개방형 가상 세계)가 화제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데 착안해, 세컨드라이프에 약간의 땅을 임대해 대안공간 풀과 똑같이 생긴 빌딩을 지어 놓았다. 작가는 자신의 부동산 거래를 드라마로 만들기 위해 실제 갤러리의 문을 굳게 닫고, 대신 동네 PC방을 염가(3시간에 30만 원)에 임대했다.

전후의 거장에서 21세기 신예까지, 현대미술이 거둔 성취를 살피며 그 기본 문법의 형성과 전개를 공부하는 자리다. 저자는 ‘오늘의 미술’이 “세계를 보는 방법에 관한 성찰을 담은 예술”이라 말하며, “자율성을 추구하는 작가가 보이는 세계에 이리저리 개입함으로써 얻은 사유의 어떤 물질적/비물질적 계정이 미술 작품으로 귀결된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현대미술과 시대와의 관계성을 강조하면서, “어떤 작품이 세계를 보는 방법에 관한 새로운 성찰을 결여했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작가의 것이라고 해도 ‘오늘의 미술’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라고 잘라 말한다. 우리는 책에 소개된 작가와 작품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보는 방법을 성찰하게 될 것이다.
 
 
 
임근준 미술·디자인 평론가, DT네트워크 발기인. 1971년 출생. 서울대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미술이론과정에서 석사학위를 딴 뒤, 미술교육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아트선재센터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계간 『공예와 문화』 편집장, 한국미술연구소/시공아트 편집장, 그리고 월간 『아트인컬처』 편집장을 역임하였고, 서울시립대와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사 및 디자인사를 주제로 강연 중이다.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2006), 『에스케이모마하이라이트』(2009) 등이 대표 저작이다

뒤샹

1912년 항공 공학 박람회를 관람한 뒤 뒤샹은 친구인 콘스탄틴 브랑쿠시에게 말했다. “이제 회화는 망했어, 저 프로펠러보다 멋진 걸 누가 만들어 낼 수 있겠어? 말해보게 자넨 할 수 있나?” 뒤샹이 ‘이제 회화가 망했다.’고 말한 그 자리에서 새로운 미술의 탄생은 예감되었다.



이제 뒤샹을 필두로 하는 현대 미술이 그 문을 열기 시작한다. 전통적인 회화 작품에 익숙한 사람들은 혼란스럽다. 우리 주위에 아주 익숙한 ‘물건’들이 아주 낯설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뒤샹은 이전 세대의 화가들과 완전히 다른 화가로 살았다. 고흐나 미켈란젤로와 같은 화가가 손으로 보여주는 예술에 대한 세상을 바꾸어버렸다. 그의 오브제들은 낯선 것이었다. 시장에서 구해온 남성용 소변기를 세워놓고 샘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그는 논란의 중심에 섰다. 비난과 폭언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게 뭐야, 미쳤나? 이제 예술은 망했군’. 이런 반응과 더불어 전통적인 방법에서 뭔가 돌파구를 찾는 새로운 예술가들에게 열정적인 반응이 터진다.

그는 화가의 손을 해방시켰다. 그의 오브제 작품들과 소변기, 유리, 나무 상자와 같은 ‘레디메이드’ 즉 기성품들을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산업화 시대로 도래한 물질주의 시대 대량생산 시대에 예술가로서 탄생한 것이다. 마르셀 뒤샹을 만든 것은 현대 자본주의, 대량 생산 시대이기도 하다.  







화가와 친분을 나누었던 시인 아폴리네르는 피카비아, 뒤샹과 함께 한 자동차 여행 끝에 이렇게 쓴다. 예술가의 자유로움에 대해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시인의 직관이다. “치마부에의 그림이 거리에 도열해 있는 것처럼, 우리 시대에는 루이 블레리오의 비행기를 보았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인류는 지난 천 년 동안 영광스러운 인문 과학의 호위를 받으며 고민해왔던 것이다. 어쩌면 마르셀 뒤샹처럼 미학적 편견에서 자유롭고 열성적인 예술가에게는 예술과 사람을 융화시키는 것이 책무일 것이다.”

뒤샹은 회화를 20세기 사회상의 산물로 변화시켰다. 예술이 ‘독창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뒤샹의 이러한 작업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비행기의 프로펠러를 아름다운 작품으로 전환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뒤샹, 저 멋진 것들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세상에서 고흐처럼 자신의 귀를 잘라내며 그림 한 점을 완성시키는 예술가의 초상은 이제 뒤샹이라는 이름 앞에 전 시대이며, 고전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잭슨 폴록과 같은 현대화가들, 팝 아트, 시네티즘, 미니멀 아트, 개념 예술, 보디 아트 등등 우리들에게 난해하게 보이지만 중요한 현대 미술이 폭죽이 터지듯이 이 시대의 밤하늘을 수놓기 시작한다. 뒤샹은 현대 미술의 처음을 열었고, 그들에게 자유로운 ‘화가의 손’을 선물하고 정작 자신은 침묵했다.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뒤샹의 작품 'L.H.O.O.Q'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라는 뜻의 제목을 지닌 이 작품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23년에 <큰 유리>라는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기고, 뒤샹은 표면적으로 예술가로서의 활동을 중단했다. 그리고 체스에 몰두하면서 1968년 “하기야 죽는 것은 언제나 타인들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훗날 <위대한 침묵>의 기간이라는 삶을 살았다. 미국에서는 예술가로서 영광을 누렸지만, 정작 조국 프랑스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가 예술가로서의 '활동'을 하지 않고, 체스를 두고 파리와 뉴욕 등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거의 한 평생을 독신으로 (젊어 3개월 동안 잠깐 결혼 생활을 했고, 만년에 결혼을 한번 더 하긴 하지만) 살면서 불가에서 말하는 ‘무욕의 삶’을 살았다.






체스에 열중하고 있는 마르셀 뒤샹.
그의 집안은 그가 어릴 적부터 체스를 즐겼다.


 예술가로서 이러한 행동 때문이었는지 뒤샹은 말년에 “나는 그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않았고 그 어느 누구도 내게 빚을 지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 어떤 유파나 이즘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침묵 속에서 작업한 <큰 유리>역시 사후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작업은 꾸준하게 이어졌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도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도 무관심했다.

이 침묵의 세월에 대해 만년의 뒤샹은 카반느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단절은 여러 가지 일에서 비롯되었다. 우선 예술가들과 매일같이 만나는 일, 예술가들과 살고,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하는 일이 나는 마음에 안 들었다. 1912년에 나를 좀 ‘화나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독립전시회에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를 출품했을 때였다. 사람들은 그 그림을 전시회 개막식 전에 철거하라고 내게 요구했다. 그 당시 가장 앞선 사람들은 극히 지적인 사람들이었다. <나체> 그림은 그들이 이미 그어 놓은 선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2,3년간 입체주의가 계속되었으며, 앞으로 닥쳐올 것을 예견하고 절대로 분명하고 정확한 노선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순진하고 어리석은 일로 보였다. 그 당시 그 일은, 내가 자유롭다고 믿었던 예술가들로부터 나왔고, 나를 낙담시켰다. 나는 직장을 구하고자 했고, 생트 주느비에브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그리고 혼자서 <큰 유리> 작업을 할 때의 심경을 토로하고, 사각형 속에 갇혀 있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대신 그는 유리의 투명성을 발견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작품에 대한 열정을 상실했고, 충격도 갑작스러운 결정도 없이 그렇게 살았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종하는 그룹은 그의 작품에서 열정과 충격을 받는다. 새로움에 대한 이른바 전위적인 예술가에 대한 전문가들의 반응은 거절과 퇴짜였다. 그러한 풍토 속에서 뒤샹은 화가들과 어울려 그림을 그린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에 체스에 몰입해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의 실력을 보인다. 






뒤샹은 1887년 7월 28일에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인 블랭빌에서 태어났다. 공증인인 뒤샹의 아버지는 모두 7남매를 두었는데, 생존한 6남매 중에서 뒤샹은 셋째 아들이었다. 여유 있는 집안이었고, 밤이면 체스를 두고 음악소리가 항상 흘러나왔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유복한 가정 환경이었다. 큰 형은 화가, 작은 형은 조각가였다. 뒤샹의 초기 작품들은 그에게 친밀한 블랭빌의 전원 풍경이나 가족을 그린 스케치와 유화였다. 1902년에 그린 블랭빌의 풍경은 모네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아주 편안하다. 그리고 여자 마차꾼, 칼 가는 사람, 가스공과 같은 스케치는 이야기가 있다. 칼을 가는 사람, 마차를 세워놓고 호텔에 들어가 돈벌이를 하는 여자 마차꾼, 이것은 여태 우리가 알고 있는 회화이고 예술이었다. 이 세계에서 벗어난 결정적인 계기 중의 하나가 바로 레몽 루셀의 소설 <아프리카의 인상>을 각색한 연극을 보고 나서였다.





뒤샹은 말한다. “초기에 나는 루셀에게 열광했다. 그 이유는 나로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유명한 이름이나 영향에 관계없이 완전히 독립적이라는 점이 나의 깊은 내면에서 찬탄을 끌어낸 유일한 이유이다. 아폴리네르가 루셀의 작품을 처음 보여 주었다. (중략)나의 정신 도서관에는 루셀의 모든 작품을 소장할 것이다. 그리고 시인 말라르메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동물적인 표현보다는 지성적인 표현으로 말하고 싶다. 이것이 예술이 가야 할 방향이다. 나는 ‘화가처럼 바보스럽다’는 표현에 신물이 난다.”

그리고 뒤샹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앙리 푸앵카레라고 재니스 밍크는 이야기한다. “푸앵카레는 물질을 지배한다고 믿었던 법칙이 단지 그것을 이해하는 정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일반 원리도 진실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과학은 사물 그 자체에 다다를 수 없다. 단지 사물간의 관계에만 닿을 수 있는 것이다.”

뒤샹 자신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푸앵카레의 이런 생각들은 이후 뒤샹 작품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점부터 그가 제작한 모든 작품은 개별적으로 고립되지 않고 마치 루셀의 동음이자(同音異字)처럼 서로를 반영한다. 미술사가들은 최종 결론에 다다를 수 없어 애를 먹는다. 왜냐하면 뒤샹이 만든 것과 말한 것 사이에는 어떤 궁극적인 주장도 없기 때문이다.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마르셀 뒤샹이 두 형이 머물고 있는 파리로 가 같이 살게 된 것은 1904년 10월 이었다. 그 후 만화와 회화 사이를 오가면서 그림을 그리다가 1912년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가 살롱 데 앙데팡당에서 거절당하자 그룹을 탈퇴한다. 다음해 뒤샹은 뉴욕의 아모리 쇼에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를 출품했다. 뉴욕의 화단은 놀랬고, 이후 그는 원하든 원치 않든 전위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 해에 그의 첫 오브제를 제작한다. 그리고 1915년에 그의 오브제들을 ‘레디메이드’라고 불렀다. 뒤샹은 이렇게 말했다. “예술가들이 사용하는 튜브 물감들은 제조된 생산물이자 이미 완성된 물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그림들은 ‘도움을 받은 레디메이드’이자 아상블라주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뒤샹은 알렌스버그, 월터 팩 등과 함께 독립미술가협회를 설립한다. 이 미술전은 심사위원도 없고, 상도 없는 미술전이었다. 1917년에는 자신의 작품인 <샘>을 ‘R Mutt’란 가명으로 출품했다. 이 작품 역시 자신이 속한 독립미술가협회에서 거부된다(가명을 써서 그의 작품인지를 아무도 몰랐다). 이 작품은 전시회 전시관의 후미진 곳에 내내 방치되어 있었다. 1920년에는 만 레이를 만나 우정을 나누고, 정밀한 광학적 오브제들과 영화 실험 작업을 했다. 1923년부터 그는 완전히 예술가로서 활동을 접었다. 그는 예술가연하면서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 세월 동안 체스만 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생의 대부분을  주위와 단절한 채 고독한 작업을 했다. 사후에 공개된 <1. 폭포수 2. 점등용 가스 : 가 주어졌다고 할 때>라는 작품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미르셀 뒤샹이 'R Mutt'라는 가명으로 출품한 작품 '샘'(Fountain)


 뒤샹은 다다이즘의 앙드레 브르통과 교류하였고, 초현실주의자들의 회화와 관계를 가졌다. 그는 세상이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낙망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세상을 향해 불평불만을 터트리지도 않는다. 그는 묵묵히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완성하여 나간다. 마음을 다치게 하는 ‘반응’들이 귀찮아서였을 것이다. 뒤샹의 작품은 지금 보아도, 전통적인 그림에 익숙한 우리들의 눈에는 낯설다. 이러한 오브제, 레디메이드는 자칫 예술에 대한 경박한 행동을 낳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전혀 미술에 대해서 공부를 하지 않는 문외한이 뒤샹에 대한 자료만 보고 물건을 대충 전시해 놓고 자신도 모르는 제목하나 턱 달곤, 이것이 예술이다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곳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회화 과정을 다 거친다.

즉 1902년부터 1910년까지 ‘8년간의 수영연습’라고 한 기간, 즉 물위에 떠 있기 위해 부지런히 손발을 움직이는 시간, 열심히 그림 공부를 했다. 1902년부터는 인상주의, 상징주의, 후기 인상주의, 야수파를 거쳐서 입체주의를 습득하는 과정을 거쳤다.





1915년부터 뉴욕으로 건너가 자기 양식을 수립한 기간을 1910년에서 1915년까지로 본다. 그리고 <큰 유리>의 제작기간인 1917년에서 1923년의 기간 동안에 뒤샹은 독창적인 레디메이드를 탄생시켰다. 그의 독창성은 위대한 선배 화가들의 정신을 배우고 익히고 나서 즉 절차탁마의 기간을 거치고 나서 탄생한 ‘독창성’이고 자유로움이다.  






뒤샹은 산업화 시대에 가져온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의 작품 중에서 <왜 재채기를 하지 않지?>라는 것이 있다. 새장 안에 각설탕처럼 생긴 대리석 육면체와 온도계와 오징어뼈를 쌓아 놓은 것이다. 이 작품에 서명된 뒤샹의 새로운 예명은 로즈 셀라비이다. 이 작품은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사이의 과도기적 오브제로 평가된다. 훗날 이 작품은 파리의 초현실주의 미술 전시회에 출품된다. 뒤샹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 작은 새장은 각설탕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각설탕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그걸 들어보면 생각지 못한 무게에 다소 놀랄 것이다. 온도계는 그저 대리석의 온도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작품처럼 설명도 난해하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작품에 대한 쉽고 전통적인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감상자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불편하게 한다.

뒤샹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일까 고민하면, 차라리 재채기를 한번 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이건 어쩌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우리들의 영혼을 깨기 위한 도끼자국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 재니스 밍크는 이러한 나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짐작하고 이렇게 자상하게 설명해 준다. “뒤샹의 작품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여러 언어로 된 수백 번의 인터뷰와, 잡지 기사를 낳았고,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뒤샹의 삶과 작품은 해석을 조금만 바꾸어도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읽힌다. 뒤샹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그것이 억설일지라도 침착하고 너그럽게 대했다. 사람들에 의해 체계화되어 새로운 창조물이 된 자신의 작품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언제나 진실한 것은 아닐지라도.” 뒤샹은 솔직히 어렵다 라고 말하는 것이 속 편하다. 그리고 더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라고 한다면 되겠다. 







우리들에게 익숙한 모나리자의 모습에 콧수염을 그려 넣은 뒤샹. 다빈치의 걸작인 모나리자의 그림에 콧수염만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왜 여인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남성화시키는 걸까? 그는 가부장의 화신인가? 뒤샹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러한 선입견을 우선 버려야 하는 건 아닌가? 우리는 이미 대량 생산되는 물질의 세상에서 아무런 이해도 없이 그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왜 물건들이 만들어졌을까? 그것들은 우리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텔레비전이나 휴대폰, 그리고 각종 장비들 속에서 우리는 정말 행복한가? 그리고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것들은 정말 나를 자유롭게 하는가?

뒤샹이 레디메이드, 즉 이미 만들어져 있는 물건들을 통해 우리에게 정말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일까?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고 느끼는 그런 감정, 뒤샹에게 그런 감동을 느낀다면 좋은 것이고, 만약 아니라면 그냥 그 마음을 내버려 두자. 뒤샹의 그림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닐테니까…. 하지만 뒤샹은 예술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 주위에서 가장 가깝게 존재하고 있는 것들, 그것들이 바로 삶이고 생명이라고 침묵하면서 표현한다. 뒤샹은 그걸 자신의 방식으로 창조하고 레디메이드라고 불렀다. 마치 신이 우리들을 창조했듯, 그렇게 자신의 작품을 뒤샹이라는 영혼과 일치시켰다. 그래서 뒤샹의 이 말은 비교적 쉽게 다가온다. “예술가는 영혼으로 자신을 표현해야 하며, 예술 작품은 그 영혼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뒤샹의 어려운(?) 작품에 대해 쉬운 해답을 바라서는 안될 것 같다. 어려운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대담집처럼 좋은 책도 없다. 정병관씨가 번역한 <마르셀 뒤샹- 피에르 카반느와의 대담>을 우선 권하고 싶다. 만년의 거장이 젋은이와 만나 비교적 자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0세기의 가장 '특별한' 예술가인 뒤샹은 항상 유희하듯 예술을 대했지만 예술에 대한 기존의 의식을 가장 급진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대담은 1966년 4월에서 6월에 걸쳐 파리 근교의 뇌이에 있는 그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뒤샹 자신에 의한 그의 인생과 작품에 대한 어쩌면 유일한 증언일 것이다. 

 




그리고 화보 중심으로 된 책 재니스 밍크의 <마르셀 뒤샹 (정진아 옮김)>은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컬러 도판들과 함께 소개한다. 뒤샹의 대담집을 먼저 읽고 이 책을 대하면 조금 더 수월하게 뒤샹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뒤샹은 미술사의 수수께끼 같다.




글 원재훈 / 시인, 소설가
글을 쓴 원재훈 1988년 시 '공룡시대'로 등단했으며 <낙타의 사랑>,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라하네>등의 시집과 <만남, 은어와 함께 보낸 하루>, <모닝커피>등의 소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나무들은 그리움의 간격으로 서 있다> 등의 산문집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집필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는 작가이다.

발행일  2009.04.10
이미지 gettyimages/멀티비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