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9일 화요일

전통문화와 전승문화의 차이점

인간은 문화를 지닌 유일한 동물로써, 문화란 그 집단의 구성원이 지닌 어떠한 양식을 뜻한다. 그 양식은 사회의 정신적, 예술적 표현의 총체이며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모든 것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가 현재 영위하고 있는 모든 결과론적 문화는 모두 과거의 변화로 부터의 산물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문화를 이야기할 때 과거의 문화적 흐름에 대해 언급을 한다. 그리고 그 과거의 문화적 흐름을 정의 하는 단어로써는 전통과 전승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곤 한다. 주로 전통과 전승이라는 단어는 문화와 함께 자주 혼용되는 단어이다. 하지만 전통문화와 전승문화는 비슷한 듯 하다 약간은 다른 의미를 지닌 단어이기도 하다.
먼저, 사전적 의미에서 전통이란, 과거부터, 전대로 부터, 내려오는 혹은 전해진 문화유산을 말한다. 객관적인 의미에서 단지 현재로 전해져 내려오는 사상 관행 등은 관습이라고 불리어 지며, 전통은 좀 더 나아가 그 시대의 주간적인 판단에 의해 가치가 인정된, 과거로부터 온 것이다. 그렇다면 전통문화란 바로 그 나라에서 발생하여 전해 내려오는 고유한 문화를 뜻하는 것이다.
“내려온다” 혹은 “전해져온다”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전통은 시간의 흐름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전통이란 과거의 어떠한 문화양식을 시간에 거쳐 현재까지도 발전시켜온 것을 의미하게 된다. 시간의 흐름과 발전이라는 전제 하에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는 3가지 단계로 나누어질 수 가 있다. 첫째, 과거로부터 전해져 내려와 현재까지도 발전되어가고 있는 전통문화. 둘째, 과거로부터 전해져 왔지만 현재 문화적 수요가 줄어들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전통문화. 셋째, 과거에서 사라져버린 전통문화이다.
그럼 첫째,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안전하게 전해져 내려온 전통문화가 무엇이 있을까? 대표적인 예로써는, 설날에 떡국을 먹는 문화, 혼례문화, 추석에 송편을 빚는 문화, 온돌문화, 혹은 태권도 문화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들에게도 매우 익숙한 우리나라 고유한 문화로써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향유가 된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와 발전이 있기도 해왔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는, 과거로부터 전해져 왔지만 현대문화가 전통적 문화를 대신하며 점차 그 영향력이 사라져가고 있는 문화가 있다. 시간을 단기적으로 쪼개 본다면 전통문화가 현대문화가 될 수도 있는 것 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현대문화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통해 우리나라 전통문화가 단절된 상태에서 발전된, 우리나라 고유한 문화가 아닌 어떠한 외부의 힘이나 현상에 의해 발전된 문화를 의미한다. 즉, 이러한 현대문화가 대체문화로써 영향력이 커지며 사라져가고 있는 전통문화의 예로는 민요, 쥐불놀이, 팽이치기, 두레 등 민중적인 문화부터 가야금, 공예, 줄타기, 모필장 등 장인 문화 등이 있다. 이러한 전통문화는 주로 대중의 관심과 수요가 줄어들어 사라져가는 것이 대체적인 이유이다.
마지막 단계는, 사라져 버린 전통문화이다.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문헌적으로 혹은 어떠한 추측으로써만 존재하는 문화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전통문화라는 것이 길면 삼국시대에서 부터 짧으면 조선시대에서 부터 생성된 문화들이다. 삼국시대 이전에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고유한 전통문화가 존재했었지만, 시대를 거치면서, 혹은 새로운 왕조를 거치면서 많은 과거의 문화들이 사라졌을 것 이라고 추측 한다. 도서관에도, 인터넷에도, 학술지에도 먼 과거의 문화에 대한 자료를 찾기가 힘들다. 이처럼, 과거 한 시점에서 사라져 버린 문화를 다시 찾아내기란 다시 살리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 사라져가는 문화도 못 지켜내는 마당에 아무도 이미 사라져버린 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보내지 않는 듯싶다. 그렇다. 한번 사라져 버린 문화는 다시 일으키기도 아니 다시 기억하기조차 힘들게 된다. 사실, 문화는 현상이지, 몇몇 사람 안에서 끝나버리는 단시간의 해프닝이 아니다. 수천시간 혹은 수 만 시간 수 천 만 명, 수 억 만 명의 사람들을 거치고 거쳐 만들어진 인류의 값진 열매이다. 하지만, 그러한 열매도 그 가지를 잃고 땅으로 떨어지면 사라지고 잊혀 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더욱 우리의 전통 문화를 지켜야만 한다. 라는 의지에 당위성의 무게를 더 실어주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라져가는, 혹은 사라진 문화를 지켜나가기 위한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바로 이러한 문제점을 풀기위한 방법에는 전승문화라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사전적 의미에서의 전승이란 무엇인가? 전승이란 어떠한 행동양식이 학습에 의해 어떤 집단에 유지되어 집단 내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 가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곳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바로 “학습”과 “행위” 이다. 즉, 전승문화란 어떠한 문화를 지켜내며 유지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그 사회 혹은 어떠한 사회 일원에게 그 문화를 학습시키는 그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더욱 쉽게 어떠한 학습을 통해 전승된 문화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전승문화는 전문적 전승문화와 민간적 전승문화로써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 번째, 전문적 전승문화의 대표적인 예로써는 무형문화제를 들 수 있다. 연극에는 인형극ㆍ가면극이 있고 음악에는 제례악ㆍ연례악ㆍ대취타ㆍ가곡ㆍ가사ㆍ시조 영창ㆍ산조ㆍ농악ㆍ잡가ㆍ민요ㆍ무악ㆍ범패가 있다. 무용에는 의식무ㆍ정재무ㆍ탈춤ㆍ바라춤ㆍ승무가 있으며, 공예기술에는 도자공예ㆍ마미공예ㆍ금속공예ㆍ화각공예ㆍ장신공예ㆍ나전칠공예ㆍ제지공예ㆍ목공예ㆍ건축공예ㆍ피혁공예ㆍ지물공예ㆍ직물공예ㆍ염색공예ㆍ옥석공예ㆍ자수공예ㆍ악기공예ㆍ초고공예가 있는 등 우리나라에는 약 103종의 무형문화재가 지정되어있다. 무형 문화재란 일정한 형태가 없는 문화재를 말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높은 가치와 문화적 기능을 지닌 사람을 인간문화재로 지정을 하여 그 기능을 후계자에게 전수 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비용을 부담 하고 있다. 대부분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분야로는 민족적 개성이 뚜렷하며 전문적인 기술과 습득이 요구되는 분야가 많다.
두 번째, 전문가가 후계자에게로 가 아닌 민간으로부터 민간에게 전승되어 내려온 민간적 전승문화가 있다. 그 예 로는 민요와 민담 그리고 놀이문화가 있다. 민간적 전승문화도 전승자가 피전승자에게 교육이나 학습을 통해서 전달하는 전승문화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규제와 보호 없이 전승되기 때문에, 전문적 전승문화와 달리 100% 있던 그대로 전승이 되진 않는다. 그래서 시대를 반영하고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전통 문화적 특성을 지니기도 한다. 시대의 지식층이 인정한 전문적 전승문화는 문화재 법으로 제정이 되어 제법? 잘 전승이 된다. (이마저도 지원이 부족한 상황이라 사라져가고 있는 상황이라고는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수많은 민간 문화들은 물리적 변화와 힘 앞에서 항상 전승의 단절의 위험을 지니고 있다. 과거 농경사회 시절, 수많은 민요들이 각각 지방의 특색을 살려 전승되어 왔었다. 그때는 다함께 일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마을어른에게 노래를 배우고 그들은 또 자식에게 그것을 가르쳤다. 하지만 산업사회의 도래와 함께, 사람들은 도시로 또 도시로 옮겨오며 개인적인 삶을 살아가기 시작 하였다. 시골도 상황은 마찬가지가 되었다. 사람이 하는 일을 기계가 대신 하기 시작하였고, 다함께 일을 하며 노래를 부를 일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수백 년 동안 전승 되어 오던 수많은 민요는 갈 곳 없이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아이들의 놀이 문화도 급격히 변화하였다,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팽이치기 등, 내가 어렸을 때까지도 있었던 놀이문화들이 컴퓨터게임의 발달과 함께 빠른 속도로 사라져버렸다.
전승문화의 위기이다. 전문적 전승문화 또한 위기에 처해져 있다. 몇 일전 신문 뉴스에서 수많은 무형문화제분들께서 전승을 할 수 있는 후계자가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실제로 그렇게 제자가 없이 세상을 떠나셔서 사라져 버린 무형문화재도 몇몇 있다고 한다. 무형문화재가 위기에 처한 이유는 바로 생계곤란 때문이라고 한다. 국가에서 지원금이 나오기는 하나, 무형문화재의 전수와 전승이라는 것이 평생을 바쳐 매진해야하는 일인 것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본인의 기술을 통해 수입을 벌어 보려고 해도, 수요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또한 매우 힘든 일이라고 한다.
전승문화를 지켜야만 한다. 전승문화가 우리나라에서 특히나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는 역사적 사실 바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과거와 현대는 있지만 과거와 현대 사의의 근대화 가 없었던 국가이다. 과거의 농경사회와 왕정사회에서 산업사회와 민주화사회로 넘어가야한다는 것을 스스로가 아프고 고뇌하며 깨우치고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고, 외세에 의해 강압적으로 근대화가 일어났다. 즉, 어린아이가 사춘기가 없이 호르몬주사를 맞고 어른이 되어버렸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호르몬주사를 놔버린 놈이 당연히 잘못된 것 이지만, 언제까지나 그놈이 사과하길 기다리며 불평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상황에서 문제점이 생겼다면, 결과적으로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놓인 우리가 풀어야할 우리의 숙제인 것이다. 전통이란, 앞에 서론에서도 말했듯이 세대에 세대를 거쳐 자연스럽게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전통은 과거와 현대 그 사이에서 50년이라는 현대와의 시간적 물리적 단절을 마주하였다. 많은 전통이 그사이 사라져 버리거나 끊겨서 더 이상 전해 내려오지 않고 있다. 우리의 뜻도 아니었는데, 이대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사라지게 떠나보내면 억울하지 않은가?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더욱이 전승문화를 발전시켜야만 한다. 전통의 근대화 과정의 공백을 과거 전통을 전승함으로써 채워놔야만 한다. 그리고 그 전승문화를 통해 우리 후손들이 올바르고 창조적이게 우리의 전통문화를 발전시켜나가게 하도록 도와야 한다.
전승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전승문화의 기본적인 시스템인 무형문화재제가 더욱 보완되고 더욱 발전되어야만 한다. 인간문화재와 그들의 제자에 대한 금전적 지원을 더욱 확대해야 하며, 전수환경 또한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다른 방안으로는 전승방법의 현대화를 모색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전승하는 1차원적인 전승방법을 넘어 책 출판, 비디오 녹화, 문서로써의 저장 등 제3매체를 통한 전승방안을 발전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특히 인터넷이나 스마트폰app 등 비 가시적이면서도 탈 공간적인 매체를 이용하여 전승효과 극대화 시켜야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것은 단연 정부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모두가 가져야 한다. 지식인들 또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최상일pd가 전국을 누비며 마지막 남은 민요들을 모아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라는 라디오 방송프로그램을 만들고 수권의 책을 펴냈듯이, 아티스트 부추라마가 전국 아이들의 놀이문화를 모아 앨범을 만들었듯이, 지식인들도 직접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어쨌든 우리의 문화를 지켜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대중의 자세 일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모든 물체의 생산과 유지는 소비에 의해서이다. 즉, 소비가 줄면 사라지고 소비가 늘면 생겨난다는 간단한 논리이다. 소비는 결국 선호도와 연관이 된다. 그렇다면 대중의 소비를 위해 대중의 선호도를 교육을 통해 변화시키던가 아니면 대중이 선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어차피 둘 중 하나만 단독적으로 일어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작용과 반작용은 함께 일어난다. 다시 말해 그 대중에 선호도라는 것은 시대를 따르는데, 시대는 계속적으로 변화한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선호도의 변화를 추론할 수 있겠고, 선호도의 변화란 즉 어떠한 문화적 소비의 대상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 바로 문화의 재조명을 의미한다. 하지만 만약, 그 때까지 우리 전통문화가 기다리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면 재조명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단지 정전만이 남아 있을 것 이다. 우리의 문화에 정전이 없기 위해선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참고: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2777 네이버지식백과:무형문화재
http://100.naver.com/100.nhn?docid=135192 네이버지식백과:전통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421634 네이버지식백과:전승
http://www.urisori.co.kr/ 최상일pd-우리의소리를찾아서
http://boochoolaamaa.kr/부추라마 :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214&article_id=0000035340§ion_id=103&menu_id=103/ MBC뉴스데스크-무형문화재의위기
논문: 현대사회속의 전통적 민속문화. 경남문화연구소. 1999

2011년 10월 18일 화요일

About Hipster -2 힙스터 정의하기 (패션)

그럼 이때쯤 힙스터란 무엇인가 궁금할 수 도 있다.
힙스터를 정의하기위한 기준을 약간은 풍자적이며 조롱적으로 세워보았다.
(힙스터라는 용어자체가 가벽고가볍고 한없이 cool한 용어이다. 절대로절대로 진지하게 생각하지말자.)

-이 정의기준은 오로지 내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와 관점에의해 쓰여진것임을 미리 언급한다.




힙스터의 패션(衣)

1.명품보다는 빈티지.
-힙스터에게 명품은 없으니만 못하다. 반 자본주의적 성향이 강한그들에게, 명품소비는 곧 자본주의에 대한 복종이고 남들과 같은 가방을 매고 옷을 입는다는 것은 용납할수 없는 수치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점은, 예를들어 디자인 없이 단지 명품로고만 크게 박혀져 있는 가방은 안되지만, 명품로고가 숨어있지만 아름다운 디자인을 가진 명품가방은 OK. 옷을 단지 소비의 목적으로 바라보는것이아니고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기때문에, 패션에 매우 민감하다.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자기스타일대로 입는다. 특이하면서도 개성있는 스타일을 가장 최고시 여기며, 값싸고 독특한 옷을 찾을수 있는 빈티지샵이나 Thrift shop (중고물품샵)을 주로 이용한다. 시대를 잘만나면 유행에 앞서가기도 하고 잘못만나면 거지취급받기도 한다.

2.쫄바지는 게이만 입는게 아니다.
-옷을 사면 그대로 입기보다는 자신의 개성에의해 자신의 취향에의해 주로 세탁소에서 수선을하거나 직접 고쳐입는다. 힙스터들은 대게 손재주들이 좋다. 남자들은 특히 바지의 핏에 민감하며 애기옷 입은것처럼 약간은 짧아 복숭아뼈가 살짝 보이는 바지길이를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3.신발은 맨발로 신어야지.
하이힐보다는 운동화 단화를 좋아한다. 활동적이고 걷기좋아하는 이들에게 하이힐과 구두는 허세이다. 아무 단화를 신는것 같지만, 신발과 옷의 색깔매치는 빠질수없는 하루를 시작하는 중요한 선택중하나이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물려받은 하이힐과 구두는 OK. 신발은 맨발로 신는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하며 발이 시릴경우에는 양말을 신어도 되는데 아무거나 신어서는 안된다. 최대한 Ironic하고 어이없는 컬러선택을 해야한다. 빨래를 잘못해서 신게된 짝자기 빨간양말과 흰양말은 양말선택의 좋은예가 될수있다.

3.수염은 옵션
귀찮아서/섹시해보이려고/스타일리쉬해보일라고/ 많은 이유가있겠지만 힙스터들에게는 아마 귀찮아서가 가장큰이유일것같다. 귀찮아서 길렀는데 워낙 다른패션에 신경을 많이 쓰다보니 자동적으로 수염까지 의도된 스타일로 오해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간혹 수염에 집착하는 힙스터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딱보면 딱 그래보인다.

4.중은 제머리를 못깍지만 힙스터는 제머리를 깎는다.
주로 스스로 머리를 자르거나 아니면 서로 머리를 잘라준다. 염색도 스스로하거나 서로해준다. 다시 언급하지만 힙스터들은 손재주가 좋다.

5.비가오는 밤에 선글라스 2.0시력도 조영남안경
비가오는 밤에 선글라스를 끼는걸 즐긴다. 여기서 알아둬야하는 점은 뭐든 Ironic한것을 가장 이상적인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때문에 햇볓쨍쨍한날에 선글라스 끼는건 너무 당연하고 평범하고 makes sens하기때문에 비가오는 밤에 선글라스를 껴야한다. 알없는 조영남안경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 선글라스와 안경이란 단지 악세서리일뿐이다.

6.타투?
혐오스러운 타투는 No. 특히 에드하디 스타일의 강렬한 타투는 절대적으로 No. 하지만 직접디자인한 아티스틱? 한 타투는 OK. 여기서 아티스틱의 기준이 모냐는 의문이 있을것이다. 사실 모든 힙스터 패션에 정확한 정답은없다. 자신의 개성을표현하는한 모든것은 다 좋다라고 하면서 쿨한척 패션의 범주를 열어두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안되는게 너무많다.

-힙스터 패션은 어려운게 아니다. 간단하게 말하여, 멋대로 입되 보기에 좋으면서 아이러닉하기 까지 해아하는 것이다. 자기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중요하며 어설프게 남의 패션을 따라하거나 유행을 따르는것은 힙스터들에게는 패션테러리스트라고 불리울수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의 개성을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약간은 금기시되는 패션이있다.

1.과도한 힙합패션 2.근육을자랑하는 난닝구 3.야한옷 4.점잖은옷 5.로고가 큰 옷

개성있는 패션의 좋은예 나쁜예
나쁜예) Jersey shore에 출현하는 친구들/ 패리스힐튼/
좋은예) 조니뎁/할머니/할아버지/

결과적으로 힙스터 패션이란 개인의 개성을 가장 중시하는 경향을 볼수있다. 거대자본주의에 이해 일반화되어가는 시장속에서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지켜나간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한편으로는 개성이라는 용어로써 모든 패션에 너그러운척하면서도 그안에서도 나름 엄청나게 까다롭게 나쁜 패션을 명시하고 패션을 정의하는 모순적인 행동에 의해 많은사람들에게 조롱을 많이 당하는 것도 사실이다.

2011 봄

한바라시

About Hipster -1

사실 내가 제일 처음 브룩클린에대해 알기이전에 (맨하탄 옆에있는 위험하다고 사람들이 그러는 도시 라고가아니고 매력적인 진짜 브룩클린에 대해) 브룩클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었던 용어중 하나가 Hipster이다.

무엇이 힙스턴가요? : )





 
힙스터란?
힙스터(Hipster)는 아편을 뜻하는 속어 hop에서 진화한 hip, 혹은 hep이라는 말에서 유래했고 1940년대의 재즈광들을 지칭하는 슬랭이었다. 한 세대가 지난 1990년대 이후, 뉴욕을 중심으로 독특한 문화적 코드를 공유하는 일부 중산층 출신의 백인 젊은이들을 힙스터라고 부르고 있단다.힙스터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는 쫄청바지, 무기어 자전거, 유럽식 담배, 미국식 장식품 (예를 들어 나이키 마크), 질좋은 차와 커피, 인디 음악, 독립 영화 등이 있고, 아는 척하기, 아닌 척하기, 주류에서 벗어난 대안 문화, 냉소, 실없음, 그리고 쿨해지기 등의 특징이 있다
-참조: 위키피디아
 
위키피디아님의 정의가 99퍼센트는 맞지만 약간은 정의가 아이러니하다. 아이러닉함 그게 바로 그들의 특징이다.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니,

옛날부터 아티스트들의 이동경로를 보자면은 금전적인 문제가 대부분의 영향을 끼치는 듯하다.

옛 날옛적 호랑이담배피던시절의 첼시지역은 봉제공장지역이였었는데, 모든공장이 중국이나 인도 해외로 빠져나감에 의해 폐허가 되었던 첼시지역에 돈이없는 아티스트들이 모여살기 시작하였다. 아티스트들이 모여사니 아티스트들을 좋아하는 힙 한 청년들도 모이고 동네는 활기가 가득차다. 건물주들은 동네가 인기가 높아지니 점점랜트비를 올리고 돈이없는 아티스트들은 강건너 부룩클린으로 넘어가게된다.



당시 warehouse나 factory로 폐허가되어있던 브룩클린, 윌리암스버그.
브룩클린으로 넘어간 아티스트들은 또다시 동네에 활기를불어놓고, 뭔가 특별한 즐거움을 찾던 맨하탄 힙 한 청년들 또한 윌리암스버그를 발견하고 그곳에 둥지를 트기시작했다.

결국 윌리암스버그는 맨하탄 첼시보다 더 매력적인 동네가 되었고, 그러다보니 요즘들어서는 윌리암스버그 랜트비가 거의 맨하탄랜트비와 비슷해지는경향이있다.

안타갑게도, 돈없는 아티스트들은 한명두명 다시 윌리암스버그를 떠나준비를하고있다.

어디로가나 봤더니, GM이 떠난 미국최대의 폐허유령도시 디트로이트라고한다. 디트로이트에 집한채사두면 부자가 될듯싶다.



어쨋든 지금 브룩클린 윌리암스버그에는 돈이 나름 있는 아티스트/맨하탄 출신 힙한 청년 거대집단이 거주하고있다. 그들의 이름은 힙스터. 아티스트라고하기에는 약간은 가볍고, 일반인이라고 하기엔 절대 평범하지는 않은 정의내리기 힘들고 아이러닉한 매력적인 이 집단.


소위말해 Dick head라고 불리우는 이들은 대부분의 미국 청년들에 의해 made fun 되고있기도 하면서 동시에 나름 부러움을 사고있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을 Hipster라고 부르지 않으며 자신또한 Hipster를 조롱하고 비웃는것을 즐긴다. 이점도 아이러닉한 사실.

사실 이 힙스터는 브룩클린 윌리암스버그에만 존제하는것은아니다. 서울에도 런던에도 파리에도 존재한다. 자본주의 후 어느정도 물질의 풍요를 느끼고 자라온 젊은이들사이에서의 발생되는 사회적현상/물결/ 이라고 피상적으로 정의내릴수 있을것같다.






Being a dick head is cool!


2011 봄

한바라시

잊혀저가는 우리의 정신 그리고 그 숨겨진 가능성- 영화 서편제를 보고

잊혀저가는 우리의 정신 그리고 그 숨겨진 가능성
-영화 서편제를 보고.
전통문화란 그 나라에서 발생하여 전해 내려오는 고유한 문화를 뜻한다. 그리고 문화란 제 민족의 양식을 고려할 때 한 사회의 구성원이 갖는 법, 도덕, 신념, 예술, 기타 여러가지 행동양식을 총괄하는 것 이라고 정의 되어진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문화로써 해석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전통문화 중에서도 설날, 추석문화, 혹은 태권도 등 현재 우리주변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고 지금 까지도 잘 전해 내려오는 전통문화가 있는 반면, 민요, 판소리 등 서양식 현대가요 등의 대체문화가 전통문화 사회적인 기능을 대신하며 점차 그 영향력이 줄어들며 사라져 가는 전통 문화가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후자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다. 일단 문화라는 것은 한번 사라지면 다시 되돌리기가 힘들며, 작은 한 종류의 문화라도 그 문화는 동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의 삶과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강원도 지방의 밭가는 소리를 들어보면, 2분도 안되는 짧은 음귀 이지만 밭을 가는 방법부터 당시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와 생각 그리고 소를 대하는 자세 까지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소수민족의 언어가 있다. 몇 해 전 EBS에서 틈틈히 해주는 프로그램중 지식채널-E라는 프로그램에서 소수민족의 언어에대한 주제로 방송을 할 때 시청을 한적이있다. 그 때 방송에서, 북극에 살고있는 소수민족 이누이트족이 쓰는 언어에서는 우리가 보기에는 똑같은 얼음을 주변자연환경과 물리적인 요소에의해 수십개의 이름으로 달리 불른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문화는 선조들의 지혜를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런 문화가 올바른 방법으로 기록되지않고 계승되지 않는다면 우리 이전에 그문화를 형성했던 모든사람들의 삶과 지혜를잃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이 되었다.

어느 날, 친구와 온라인 메신저로 대화 중 우연히 우리가 어렸을 적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는 뭐 하고 놀았을 까? 라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지금 같아서는 컴퓨터가 없는 세상은 단 하루도 상상할수 없는데, 그 땐 그것이 당연한것이였고, 그당시에 나와 내친구는 탈출, 땅따먹기놀이, 고무줄 총 만들기, 미니카 경주, 한발뛰기 등 컴퓨터가 아닌 다른 놀이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동네 놀이터를 가도 그러한 놀이를 하는 동네꼬마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나 또한 오랜만에 기억을 해보려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가 알고 있던문화가 이렇게 사라지나 생각하니 정말 안타갑고 슬퍼졌다. 그러한 여러가지 생각을 바탕으로, 사라가져 가는 문화중에서도 특히 전통민요에 대해 관심을갖기 시작했다. 첫째, 내 세대의 문화가 아니라는 점이 나에게 오히려 매력적이게 다가왔고. 둘째, 사라져 가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갖고 싶어졌다. 전통민요 안에서도 신세타령노래에 한 때 푹 빠져있던 적 이있었다. 노래를 통한 갈등의 해소라는 성격은 결코 과거의 이슈일뿐만 아니라 현대의 이슈라고도 생각했다. 그 정신을 현대적으로 풀어 보고 싶었으며 민요와 내 주얼리 작품과 접목시켜 퍼포먼스 작품을 만들어 몇 달전 강원도에서 전시회를 할 때 발표했던 적이있었다.

그래서 이번 과제에서도, 전통민요와 관련된 무언가를 관람하고 싶었다. 직접 시골에 내려가 어르신들께 소리 한구절 청해 듣고 싶었지만, 상황이 되지않아 다른 방법을 택해야만 했다. 인터넷에서 민요와 관련된 여러가지 영화 뮤지컬 혹은 행사를 찾아보던 중 임권택 감독의 소리꾼의 삶을 주제로 한 영화 서편제를 발견하였으며, 민요는 아니지만 어쨌든 판소리도 민요가 다듬어진 형태이니 영화 서편제를 관람하기로 하였다.



 

시대배경은 1960년대초 영화 서편제는 한 남자가 소리하는 여인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던 중 소리제라는 동네 주막에 머물면서 그 여인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 남자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떠돌이 소리꾼이였던 유봉은 어느날 어느 마을 대감집 잔치집에 소리품을 팔다 그 마을 과부인 금산댁을 만나게된다. 그여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이 바로 소리하는 여인을 찾아 소리제까지 올라온 동호이다. 그리고 소리꾼 유봉에게는 양딸 송화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금산댁과 유봉이 새살림을 차리면서 송화와 동호 두아이는 오누이 사이가 된다. 아이를 낳던 금산댁은 아이와 함께 죽고말고, 유복은 송화에게는 소리를 가르치며 동호에게는 북을가르치며 떠돌이 소리꾼 생활을 계속한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는 점차 서양문명이 들어오고 소리를 찾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소리는 점점 멸시받고 냉대받는 그런 시기에 소리를 하며 떠돌아 다니기를 몇년, 결국 동호는 궁핍한 생활을 견디다 못하고 집을 뛰처나가고 만다. 그리고 유봉은 송화가 도망갈까봐, 혹은 송화의 소리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집착에 약을 먹여 송화의 눈을 멀게 만든다. 유봉은 장님이 된 송화를 데리고 떠돌면서 소리를 가르치다 결국 송화에게 마지막 사죄를하며 눈을 감고만다. 그리고 집을 나간지 몇년 후, 누이와 아버지를 떠났다는 죄책감과 그리움에 봉호는 송화를 찾아 떠나지만,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 소리를 하며 떠돌아다니는 누이를 찾은일은 쉬운일이 아니였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주막에 머물게 되는데 그곳에서 송화를 재회하게 된다. 오누이는 재회의 인사 대신 심청가를 부르며 말없이 하염없는 눈물만 흘린다. 그리고는 서로에게 작별인사도 없이 각자의 길을 떠나며 영화는 마무리가된다.

이까짓 소리하면 돈이나와 쌀이나와라고 소리치는 아들 동호에게 자기가 소리에 미쳐서 득음을하면 어느 부귀영화보다 좋은것이여라고 말하는 아버지 유봉을 보면 어찌보면 지나치게도 순수하고도 순수한 예술가의 장인정신을 엿볼 수 가있다. 가진것 하나없이 떠돌아다니면서도 오직 소리만을 통해 희노애락을 느끼는 그를보면 행복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런 그를 포용할수없는 사회를 보면서 안타가워보이기도 하였다.

드라마틱하게 눈물을 쥐어짜는 스토리도 아니고 대사가 많은것도 아니였지만, 대신 노래를 들려주는 신이 많던 영화였다. 놀라웠던점은 그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며, 나도 모르게 그들과 함께 그들의 노래속에서 울고 웃고 하고 있었던 것이였다. 유봉과 동호 송화가 함께 불렀던 아리랑은 어떤 장면보다 신명났고 동호와 송화가 마지막에 불렀던 심청가 장면은 어떤장면보다 구슬프게 다가왔다. 가사의 내용보다 부르는이의 감정이 먼저 내 심장을치고 노래가 귀에 울려퍼졌다. 우리 소리가 이렇게나 감정적인 노래였는지 사실 잘 알지는 못했던지라 영화를 본뒤 그 감동은 매우 컸었다. 인간의 감동이라는 감정은 공감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들의 노래에 그리 쉽게 감정이입을 할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외국인이 이 영화를 봤을 때랑 한국인이 이 영화를 봤을때랑의 감동은 다를 것이다. 외국인이 다른문화에 대한 신기함으로 이영화를 감상하였다면, 한국인은 이영화를 보고 공감과 거기서 오는 감동의 전율을 느낄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 해야 하는 점, 왜 우리가 우리문화를 아껴야 하는 점 일 것이다. 우리문화를 가장 잘 이해할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 한국인, 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했으니 사람들의 생각화 행동양식도 변하고 그것에 따른 모든 문화적양식이 변한다는 것은 당연한것이다. 하지만 모든 변화의 결과에는 변화의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현대 우리가 어떠한 특정한 문화를 좋아하고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는 그러한 특정한 문화를 좋아하기 까지의 과정이 있다. 예를 들어 현재, TV프로그램을 보면 나는가수다”, “슈퍼스타케이등 노래하는 프로그램이 참많다. 옛부터 너도나도 노래하고 노는것을 좋아했던 민족이였던지라, 특히나 이러한 노래 프로그램에 열광하는지도 모르겠다. 전통 문화와 현대적 추구성이 잘 어울린 또다른 예가 있다. 바로, 현재 KBS에서 방영중인 공주의 남자가 그 예이다. 첫 예고편을 봤을때 눈에 들어왔던 문구가 하나 있다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 로미오와 줄리엣은 매우 유명한 세익스피어의 비극 작품이다. 이제것 영화로 만들어 진것만 수십편이며 연극부터 뮤직컬 까지 수백번에 거쳐 재해석이 되온 작품이다. 이러한 소재를 어떻게 조선이라는 우리나라의 문화에 알맞게 조합을 할까 궁금 해서 시청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어쩌면 이제는 진부할수 있는 스토리에 우리만의 감정인 절제와 그에 따른 한이 담겨있다. 그리고 역사적인 사실까지 사이사이 가미 시키며 작품속의 주인공의 사랑을 더욱 애절하게 만든다. 애절하다. 라는 감정을 아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욱 작품에 몰입하게 되며, 외국 사람들에게는 문화적 컨텐츠로 똘똘 뭉처진 이 작품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올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는 우리에게 뿐만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에게도 영향력을 주는 살아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현재 그모습이 점차 사라져가고 작아져가고 있더라도, 그안에는 무한한 가능속속에 거대한 시간과 수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내포하며 여전히 살아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힘을 발견할 줄알고 지켜내는건 바로 우리의 몫일 것이다. 시대가 발전하고 점차 빨리지면서, 국가시대를 넘어 이제 세계화 시대이다. 인터넷을 통해 국경은 이미 무의미해 졌으며, 여러가지 문화가 한데 섞이며 결국 빠른시간안에 문화의 단일화를 이루어 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는 두가지 선택이 있다. 섞여서 따라 갈텐가 아니면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지켜나가 세계문화를 이끌어갈텐가. 이제 전세계는 문화전쟁을 하고있다.

2011. 가을
한바라시

2011년 9월 1일 목요일

내가 생각하는 예술적 아름다움

 도대체 예술에서 말하는 진정한 미란 무엇인가? 무엇을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며 좋은 예술이라고 이야기 하는가?

예술가로써 누구나 한번쯤 하는 고민일지도 모른다.

나 또한 항상 고민하고 질문하는 그런 주제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어렴풋한 나만의 "절대적기준점"이있어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한다.
첫째, 감정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예술작품이 있다. 감정적 아름다움이란 다른 부수적인 모든 자극들을 배재한체 오로지 솔찍한 마음과 감정의 동요를 통해 전달되는 자극을 말한다.
예를들어, 이성보다는 현실의 감정을 중요시여긴 많은 표현주의 작가들에게서 그러한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는 작품을 찾아볼수있으며, 구체적으로는 뭉크의 작품을 예로 들수 있다. 그에대해 모르는 이가 그의 그림을 볼지라 하더라도, 그에 그림에는 대중을 압도하는 어떠한 감정적인 힘이 있다. 그 표현의 힘은 개인의 철저한 고뇌와 그 감정의 시각적표현을 의미한다.
둘째, 지적 아름다움

셋째, 시각적아름다움



이것이 현대적 미술: 로버트 라우센버그에서 롱갤러리까지


우리 시대의 피카소

‘우리 시대의 피카소’는 생전에 명예와 부, 대중적 인기 모두를 거머쥐었지만, 일찌감치 미술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덕에, ‘살아 있는 화석’으로 미술계의 비난과 조롱을 감내해야 하는 작가의 모순적 상황을 의미한다. 1950년대부터 60년대 중반까지가 최전성기였던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자신의 작품에 성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추상표현주의에서 팝아트로 전개되는 현대미술의 역사에 교두보 역할을 하면서 ‘미국의 피카소’로 추앙받았다. 제프 쿤스는 1980년대 유행했던 키치 미학을 바탕으로, ‘미술사적 농담’을 던지는 개념주의적 성격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전후 미술과 컨템퍼러리 아트를 분리하는 살아 있는 기준점이다. 데미안 허스트는 80년대 후반에 ‘yBa’의 리더로 세계적 주목을 받으면서 영국 현대미술의 부활을 이끌었지만, 지금은 국제미술 시장의 비정상적 호황과 일련의 소동을 상징하는 ‘퇴물’로 전락하였다.


전후 일본 아방가르드 미술

제국에서 태어나 패전국의 젊은이로 교육받았으며, 1930년대생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전후 일본 아방가르드 미술의 대표적 작가를 살펴본다. 쿠도 테츠미는 원자 폭탄의 트라우마를 작품의 내적 동력으로 삼고, 원폭 이후 가상의 변종 생태계를 꾸며내 서구의 휴머니즘이 지닌 이율배반적 성격을 비판하는 작업을 제작했다. 요코오 타다노리는 다이쇼/쇼와 시대의 토착적 디자인 문법을 차용해 전후 재건된 일본의 도상학을 재구축했다.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전위예술그룹 ‘하이레드센터’를 조직해 활동하면서, 전후 일본에서 ‘예술이 무엇인가’란 질문에 강렬한 화답을 던졌다. 오노 요코는 “진실의 직조”를 작업의 신조로 삼고 개인의 거짓을 세계가 공유하는 실제로 만듦으로써 인생 자체가 ‘아트’와 ‘역사’가 되었다.


에이즈 시대의 미술

1981년 등장한 에이즈는 사회 전반의 보수화를 촉진했을 뿐 아니라, 예술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대표 듀오 작가 길버트와 조지는 종교적 도상의 형식을 차용해 청소년 범죄와 에이즈를 비롯한 각종 사회 문제를 우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외설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에이즈에 걸린 이후 논란을 일으킨 포르노그라피 형식의 사도-마조히즘적 이미지 대신, 이상화된 육체의 아름다움과 그에 상반되는 죽음의 문제를 탐구했다. 장 미셸 바스키아와 함께 80년대 그라피티 작업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키스 해링은,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로서 직접 에이즈 재단을 만들어 에이즈 공포증과 동성애자 차별에 맞서 싸웠다. 쿠바 태생으로 90년대 뉴욕에서 활동하다 에이즈 관련 합병증으로 요절한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는, 에이즈로 먼저 사망한 자신의 동성 애인과 연관된 개인적 일화와 기억을 정치적 비평 혹은 성찰이 되도록 만들었다.


대중문화의 재탄생

다양한 대중문화 요소를 작업의 기초로 삼고, 새로운 문화·사회사적 의미를 직조해내는 작가들의 작업을 살펴본다. 미국식 편집광인 리처드 프린스는 각종 광고 사진, 성적 농담, 다른 작가의 작품과 같은 다양한 수집품으로, 미국사회의 독특한 속성, 즉 ‘미국성’이란 관념을 드러낸다. 현태준의 작업은 대중문화의 파편적 요소를 편집증적으로 수집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축된 이상향의 세계에서 쾌락을 얻는 일본 ‘오타쿠’ 문화의 한국식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칠진』과 『가짜잡지』는 미술계에 등장한 한국식 대안 잡지로, 1970년대 중반 미국의 뉴욕에서 태동한 ‘다운타운 문학계’의 대표 잡지인『C와 D사이』처럼 “비주류의 시학”을 담고 있다.


개입의 방식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 다양한 사회 문제에 개입하는가? 고든 마타-클락은 재개발을 앞둔 주택을 반으로 자르거나, 버려진 건물 바닥과 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의 공간 관념을 지배하는 건축 질서의 이면을 드러냈다. 크시슈토프 보디츠코는 뉴욕의 노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쇼핑 카트를 개조한 노숙차를 만들어 자본주의 모순을 드러내는 정치적 공공 미술을 선보였다. 디르크 플라이슈만은 인터넷 강국인 한국에서 아직 세컨드라이프(Second Life: 샌프란시스코의 린덴랩이 시작한 개방형 가상 세계)가 화제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데 착안해, 세컨드라이프에 약간의 땅을 임대해 대안공간 풀과 똑같이 생긴 빌딩을 지어 놓았다. 작가는 자신의 부동산 거래를 드라마로 만들기 위해 실제 갤러리의 문을 굳게 닫고, 대신 동네 PC방을 염가(3시간에 30만 원)에 임대했다.

전후의 거장에서 21세기 신예까지, 현대미술이 거둔 성취를 살피며 그 기본 문법의 형성과 전개를 공부하는 자리다. 저자는 ‘오늘의 미술’이 “세계를 보는 방법에 관한 성찰을 담은 예술”이라 말하며, “자율성을 추구하는 작가가 보이는 세계에 이리저리 개입함으로써 얻은 사유의 어떤 물질적/비물질적 계정이 미술 작품으로 귀결된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현대미술과 시대와의 관계성을 강조하면서, “어떤 작품이 세계를 보는 방법에 관한 새로운 성찰을 결여했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작가의 것이라고 해도 ‘오늘의 미술’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라고 잘라 말한다. 우리는 책에 소개된 작가와 작품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보는 방법을 성찰하게 될 것이다.
 
 
 
임근준 미술·디자인 평론가, DT네트워크 발기인. 1971년 출생. 서울대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미술이론과정에서 석사학위를 딴 뒤, 미술교육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아트선재센터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계간 『공예와 문화』 편집장, 한국미술연구소/시공아트 편집장, 그리고 월간 『아트인컬처』 편집장을 역임하였고, 서울시립대와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사 및 디자인사를 주제로 강연 중이다.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2006), 『에스케이모마하이라이트』(2009) 등이 대표 저작이다

뒤샹

1912년 항공 공학 박람회를 관람한 뒤 뒤샹은 친구인 콘스탄틴 브랑쿠시에게 말했다. “이제 회화는 망했어, 저 프로펠러보다 멋진 걸 누가 만들어 낼 수 있겠어? 말해보게 자넨 할 수 있나?” 뒤샹이 ‘이제 회화가 망했다.’고 말한 그 자리에서 새로운 미술의 탄생은 예감되었다.



이제 뒤샹을 필두로 하는 현대 미술이 그 문을 열기 시작한다. 전통적인 회화 작품에 익숙한 사람들은 혼란스럽다. 우리 주위에 아주 익숙한 ‘물건’들이 아주 낯설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뒤샹은 이전 세대의 화가들과 완전히 다른 화가로 살았다. 고흐나 미켈란젤로와 같은 화가가 손으로 보여주는 예술에 대한 세상을 바꾸어버렸다. 그의 오브제들은 낯선 것이었다. 시장에서 구해온 남성용 소변기를 세워놓고 샘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그는 논란의 중심에 섰다. 비난과 폭언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게 뭐야, 미쳤나? 이제 예술은 망했군’. 이런 반응과 더불어 전통적인 방법에서 뭔가 돌파구를 찾는 새로운 예술가들에게 열정적인 반응이 터진다.

그는 화가의 손을 해방시켰다. 그의 오브제 작품들과 소변기, 유리, 나무 상자와 같은 ‘레디메이드’ 즉 기성품들을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산업화 시대로 도래한 물질주의 시대 대량생산 시대에 예술가로서 탄생한 것이다. 마르셀 뒤샹을 만든 것은 현대 자본주의, 대량 생산 시대이기도 하다.  







화가와 친분을 나누었던 시인 아폴리네르는 피카비아, 뒤샹과 함께 한 자동차 여행 끝에 이렇게 쓴다. 예술가의 자유로움에 대해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시인의 직관이다. “치마부에의 그림이 거리에 도열해 있는 것처럼, 우리 시대에는 루이 블레리오의 비행기를 보았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인류는 지난 천 년 동안 영광스러운 인문 과학의 호위를 받으며 고민해왔던 것이다. 어쩌면 마르셀 뒤샹처럼 미학적 편견에서 자유롭고 열성적인 예술가에게는 예술과 사람을 융화시키는 것이 책무일 것이다.”

뒤샹은 회화를 20세기 사회상의 산물로 변화시켰다. 예술이 ‘독창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뒤샹의 이러한 작업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비행기의 프로펠러를 아름다운 작품으로 전환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뒤샹, 저 멋진 것들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세상에서 고흐처럼 자신의 귀를 잘라내며 그림 한 점을 완성시키는 예술가의 초상은 이제 뒤샹이라는 이름 앞에 전 시대이며, 고전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잭슨 폴록과 같은 현대화가들, 팝 아트, 시네티즘, 미니멀 아트, 개념 예술, 보디 아트 등등 우리들에게 난해하게 보이지만 중요한 현대 미술이 폭죽이 터지듯이 이 시대의 밤하늘을 수놓기 시작한다. 뒤샹은 현대 미술의 처음을 열었고, 그들에게 자유로운 ‘화가의 손’을 선물하고 정작 자신은 침묵했다.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뒤샹의 작품 'L.H.O.O.Q'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라는 뜻의 제목을 지닌 이 작품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23년에 <큰 유리>라는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기고, 뒤샹은 표면적으로 예술가로서의 활동을 중단했다. 그리고 체스에 몰두하면서 1968년 “하기야 죽는 것은 언제나 타인들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훗날 <위대한 침묵>의 기간이라는 삶을 살았다. 미국에서는 예술가로서 영광을 누렸지만, 정작 조국 프랑스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가 예술가로서의 '활동'을 하지 않고, 체스를 두고 파리와 뉴욕 등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거의 한 평생을 독신으로 (젊어 3개월 동안 잠깐 결혼 생활을 했고, 만년에 결혼을 한번 더 하긴 하지만) 살면서 불가에서 말하는 ‘무욕의 삶’을 살았다.






체스에 열중하고 있는 마르셀 뒤샹.
그의 집안은 그가 어릴 적부터 체스를 즐겼다.


 예술가로서 이러한 행동 때문이었는지 뒤샹은 말년에 “나는 그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않았고 그 어느 누구도 내게 빚을 지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 어떤 유파나 이즘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침묵 속에서 작업한 <큰 유리>역시 사후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작업은 꾸준하게 이어졌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도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도 무관심했다.

이 침묵의 세월에 대해 만년의 뒤샹은 카반느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단절은 여러 가지 일에서 비롯되었다. 우선 예술가들과 매일같이 만나는 일, 예술가들과 살고,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하는 일이 나는 마음에 안 들었다. 1912년에 나를 좀 ‘화나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독립전시회에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를 출품했을 때였다. 사람들은 그 그림을 전시회 개막식 전에 철거하라고 내게 요구했다. 그 당시 가장 앞선 사람들은 극히 지적인 사람들이었다. <나체> 그림은 그들이 이미 그어 놓은 선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2,3년간 입체주의가 계속되었으며, 앞으로 닥쳐올 것을 예견하고 절대로 분명하고 정확한 노선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순진하고 어리석은 일로 보였다. 그 당시 그 일은, 내가 자유롭다고 믿었던 예술가들로부터 나왔고, 나를 낙담시켰다. 나는 직장을 구하고자 했고, 생트 주느비에브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그리고 혼자서 <큰 유리> 작업을 할 때의 심경을 토로하고, 사각형 속에 갇혀 있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대신 그는 유리의 투명성을 발견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작품에 대한 열정을 상실했고, 충격도 갑작스러운 결정도 없이 그렇게 살았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종하는 그룹은 그의 작품에서 열정과 충격을 받는다. 새로움에 대한 이른바 전위적인 예술가에 대한 전문가들의 반응은 거절과 퇴짜였다. 그러한 풍토 속에서 뒤샹은 화가들과 어울려 그림을 그린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에 체스에 몰입해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의 실력을 보인다. 






뒤샹은 1887년 7월 28일에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인 블랭빌에서 태어났다. 공증인인 뒤샹의 아버지는 모두 7남매를 두었는데, 생존한 6남매 중에서 뒤샹은 셋째 아들이었다. 여유 있는 집안이었고, 밤이면 체스를 두고 음악소리가 항상 흘러나왔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유복한 가정 환경이었다. 큰 형은 화가, 작은 형은 조각가였다. 뒤샹의 초기 작품들은 그에게 친밀한 블랭빌의 전원 풍경이나 가족을 그린 스케치와 유화였다. 1902년에 그린 블랭빌의 풍경은 모네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아주 편안하다. 그리고 여자 마차꾼, 칼 가는 사람, 가스공과 같은 스케치는 이야기가 있다. 칼을 가는 사람, 마차를 세워놓고 호텔에 들어가 돈벌이를 하는 여자 마차꾼, 이것은 여태 우리가 알고 있는 회화이고 예술이었다. 이 세계에서 벗어난 결정적인 계기 중의 하나가 바로 레몽 루셀의 소설 <아프리카의 인상>을 각색한 연극을 보고 나서였다.





뒤샹은 말한다. “초기에 나는 루셀에게 열광했다. 그 이유는 나로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유명한 이름이나 영향에 관계없이 완전히 독립적이라는 점이 나의 깊은 내면에서 찬탄을 끌어낸 유일한 이유이다. 아폴리네르가 루셀의 작품을 처음 보여 주었다. (중략)나의 정신 도서관에는 루셀의 모든 작품을 소장할 것이다. 그리고 시인 말라르메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동물적인 표현보다는 지성적인 표현으로 말하고 싶다. 이것이 예술이 가야 할 방향이다. 나는 ‘화가처럼 바보스럽다’는 표현에 신물이 난다.”

그리고 뒤샹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앙리 푸앵카레라고 재니스 밍크는 이야기한다. “푸앵카레는 물질을 지배한다고 믿었던 법칙이 단지 그것을 이해하는 정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일반 원리도 진실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과학은 사물 그 자체에 다다를 수 없다. 단지 사물간의 관계에만 닿을 수 있는 것이다.”

뒤샹 자신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푸앵카레의 이런 생각들은 이후 뒤샹 작품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점부터 그가 제작한 모든 작품은 개별적으로 고립되지 않고 마치 루셀의 동음이자(同音異字)처럼 서로를 반영한다. 미술사가들은 최종 결론에 다다를 수 없어 애를 먹는다. 왜냐하면 뒤샹이 만든 것과 말한 것 사이에는 어떤 궁극적인 주장도 없기 때문이다.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마르셀 뒤샹이 두 형이 머물고 있는 파리로 가 같이 살게 된 것은 1904년 10월 이었다. 그 후 만화와 회화 사이를 오가면서 그림을 그리다가 1912년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가 살롱 데 앙데팡당에서 거절당하자 그룹을 탈퇴한다. 다음해 뒤샹은 뉴욕의 아모리 쇼에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를 출품했다. 뉴욕의 화단은 놀랬고, 이후 그는 원하든 원치 않든 전위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 해에 그의 첫 오브제를 제작한다. 그리고 1915년에 그의 오브제들을 ‘레디메이드’라고 불렀다. 뒤샹은 이렇게 말했다. “예술가들이 사용하는 튜브 물감들은 제조된 생산물이자 이미 완성된 물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그림들은 ‘도움을 받은 레디메이드’이자 아상블라주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뒤샹은 알렌스버그, 월터 팩 등과 함께 독립미술가협회를 설립한다. 이 미술전은 심사위원도 없고, 상도 없는 미술전이었다. 1917년에는 자신의 작품인 <샘>을 ‘R Mutt’란 가명으로 출품했다. 이 작품 역시 자신이 속한 독립미술가협회에서 거부된다(가명을 써서 그의 작품인지를 아무도 몰랐다). 이 작품은 전시회 전시관의 후미진 곳에 내내 방치되어 있었다. 1920년에는 만 레이를 만나 우정을 나누고, 정밀한 광학적 오브제들과 영화 실험 작업을 했다. 1923년부터 그는 완전히 예술가로서 활동을 접었다. 그는 예술가연하면서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 세월 동안 체스만 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생의 대부분을  주위와 단절한 채 고독한 작업을 했다. 사후에 공개된 <1. 폭포수 2. 점등용 가스 : 가 주어졌다고 할 때>라는 작품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미르셀 뒤샹이 'R Mutt'라는 가명으로 출품한 작품 '샘'(Fountain)


 뒤샹은 다다이즘의 앙드레 브르통과 교류하였고, 초현실주의자들의 회화와 관계를 가졌다. 그는 세상이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낙망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세상을 향해 불평불만을 터트리지도 않는다. 그는 묵묵히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완성하여 나간다. 마음을 다치게 하는 ‘반응’들이 귀찮아서였을 것이다. 뒤샹의 작품은 지금 보아도, 전통적인 그림에 익숙한 우리들의 눈에는 낯설다. 이러한 오브제, 레디메이드는 자칫 예술에 대한 경박한 행동을 낳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전혀 미술에 대해서 공부를 하지 않는 문외한이 뒤샹에 대한 자료만 보고 물건을 대충 전시해 놓고 자신도 모르는 제목하나 턱 달곤, 이것이 예술이다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곳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회화 과정을 다 거친다.

즉 1902년부터 1910년까지 ‘8년간의 수영연습’라고 한 기간, 즉 물위에 떠 있기 위해 부지런히 손발을 움직이는 시간, 열심히 그림 공부를 했다. 1902년부터는 인상주의, 상징주의, 후기 인상주의, 야수파를 거쳐서 입체주의를 습득하는 과정을 거쳤다.





1915년부터 뉴욕으로 건너가 자기 양식을 수립한 기간을 1910년에서 1915년까지로 본다. 그리고 <큰 유리>의 제작기간인 1917년에서 1923년의 기간 동안에 뒤샹은 독창적인 레디메이드를 탄생시켰다. 그의 독창성은 위대한 선배 화가들의 정신을 배우고 익히고 나서 즉 절차탁마의 기간을 거치고 나서 탄생한 ‘독창성’이고 자유로움이다.  






뒤샹은 산업화 시대에 가져온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의 작품 중에서 <왜 재채기를 하지 않지?>라는 것이 있다. 새장 안에 각설탕처럼 생긴 대리석 육면체와 온도계와 오징어뼈를 쌓아 놓은 것이다. 이 작품에 서명된 뒤샹의 새로운 예명은 로즈 셀라비이다. 이 작품은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사이의 과도기적 오브제로 평가된다. 훗날 이 작품은 파리의 초현실주의 미술 전시회에 출품된다. 뒤샹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 작은 새장은 각설탕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각설탕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그걸 들어보면 생각지 못한 무게에 다소 놀랄 것이다. 온도계는 그저 대리석의 온도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작품처럼 설명도 난해하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작품에 대한 쉽고 전통적인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감상자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불편하게 한다.

뒤샹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일까 고민하면, 차라리 재채기를 한번 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이건 어쩌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우리들의 영혼을 깨기 위한 도끼자국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 재니스 밍크는 이러한 나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짐작하고 이렇게 자상하게 설명해 준다. “뒤샹의 작품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여러 언어로 된 수백 번의 인터뷰와, 잡지 기사를 낳았고,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뒤샹의 삶과 작품은 해석을 조금만 바꾸어도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읽힌다. 뒤샹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그것이 억설일지라도 침착하고 너그럽게 대했다. 사람들에 의해 체계화되어 새로운 창조물이 된 자신의 작품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언제나 진실한 것은 아닐지라도.” 뒤샹은 솔직히 어렵다 라고 말하는 것이 속 편하다. 그리고 더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라고 한다면 되겠다. 







우리들에게 익숙한 모나리자의 모습에 콧수염을 그려 넣은 뒤샹. 다빈치의 걸작인 모나리자의 그림에 콧수염만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왜 여인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남성화시키는 걸까? 그는 가부장의 화신인가? 뒤샹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러한 선입견을 우선 버려야 하는 건 아닌가? 우리는 이미 대량 생산되는 물질의 세상에서 아무런 이해도 없이 그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왜 물건들이 만들어졌을까? 그것들은 우리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텔레비전이나 휴대폰, 그리고 각종 장비들 속에서 우리는 정말 행복한가? 그리고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것들은 정말 나를 자유롭게 하는가?

뒤샹이 레디메이드, 즉 이미 만들어져 있는 물건들을 통해 우리에게 정말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일까?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고 느끼는 그런 감정, 뒤샹에게 그런 감동을 느낀다면 좋은 것이고, 만약 아니라면 그냥 그 마음을 내버려 두자. 뒤샹의 그림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닐테니까…. 하지만 뒤샹은 예술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 주위에서 가장 가깝게 존재하고 있는 것들, 그것들이 바로 삶이고 생명이라고 침묵하면서 표현한다. 뒤샹은 그걸 자신의 방식으로 창조하고 레디메이드라고 불렀다. 마치 신이 우리들을 창조했듯, 그렇게 자신의 작품을 뒤샹이라는 영혼과 일치시켰다. 그래서 뒤샹의 이 말은 비교적 쉽게 다가온다. “예술가는 영혼으로 자신을 표현해야 하며, 예술 작품은 그 영혼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뒤샹의 어려운(?) 작품에 대해 쉬운 해답을 바라서는 안될 것 같다. 어려운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대담집처럼 좋은 책도 없다. 정병관씨가 번역한 <마르셀 뒤샹- 피에르 카반느와의 대담>을 우선 권하고 싶다. 만년의 거장이 젋은이와 만나 비교적 자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0세기의 가장 '특별한' 예술가인 뒤샹은 항상 유희하듯 예술을 대했지만 예술에 대한 기존의 의식을 가장 급진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대담은 1966년 4월에서 6월에 걸쳐 파리 근교의 뇌이에 있는 그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뒤샹 자신에 의한 그의 인생과 작품에 대한 어쩌면 유일한 증언일 것이다. 

 




그리고 화보 중심으로 된 책 재니스 밍크의 <마르셀 뒤샹 (정진아 옮김)>은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컬러 도판들과 함께 소개한다. 뒤샹의 대담집을 먼저 읽고 이 책을 대하면 조금 더 수월하게 뒤샹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뒤샹은 미술사의 수수께끼 같다.




글 원재훈 / 시인, 소설가
글을 쓴 원재훈 1988년 시 '공룡시대'로 등단했으며 <낙타의 사랑>,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라하네>등의 시집과 <만남, 은어와 함께 보낸 하루>, <모닝커피>등의 소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나무들은 그리움의 간격으로 서 있다> 등의 산문집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집필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는 작가이다.

발행일  2009.04.10
이미지 gettyimages/멀티비츠